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하라 츄야 (문단 편집) == 생애 == 1907년 4월 29일 야마구치(山口)현 요시키군[* 현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에서 출생하였다. 옛 성은 카시와무라(柏村)로 아버지 쪽 성이었으나 이후 아버지가 나카하라 가계에 양자로 편입되면서 나카하라 성을 쓰게 된다.[* 나카하라 가문은 대대로 야마구치에서 병원을 하던 부잣집이었는데, 아버지가 이 집안의 외동딸과 혼인하면서 그 집안을 잇게 된 것이다.] 고작 13살 때 <보초신문>에 투고한 단카가 입선하고 그 이후로 3년간 해당 신문에 투고된 단카가 계속 수록됨으로써 문학 활동을 시작한, 소위 말하는 조숙한 문학 천재 계열. 그러나 문학에 빠진 대신 학업은 소홀하게 되어 다니던 야마구치 중학교에서 낙제했다. 그래서 1923년에 교토의 리츠메이칸 중학교 3학년에 전입했다. 이 시기에 흡연과 음주를 배우고 연극 배우인 애인과 동거 생활도 하는 등, 만 16세 고딩이 꽤 거칠게 살았다. 1924년에 도쿄대학 불어학부였던 시인 도미나가 타로를 알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나카하라의 작품 세계 전반에 영향을 미친 프랑스 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1925년에는 일본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가 퇴학하고 도쿄에 있는 프랑스어학당인 아테네 프랑스를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리고 이즈음에 문예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 전후문학의 대가인 오오카 쇼헤이 등과 교류한다. 1926년에 <아침의 노래>, <임종>을 썼는데, 1928년에 이 두 시는 나카하라의 시들 중 최초로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1932년 드디어 생애 최초의 시집인 <염소의 노래(山羊の歌)>를 발간하려고 계획하지만 구매 후원자를 달랑 10명을 채우는 처참한 상업적 실패를 겪는다. 그러나 책 자체는 한정판인 만큼 꽤 호화스럽게 만들었다는 모양. 200부를 찍었다고 한다. <염소의 노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카하라 츄야는 문학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베를렌, 랭보의 시들을 번역 출간하고 대표적 문예지 <문학계>에 신작 시들을 올리는 한편 <염소의 노래>를 분포도라는 출판사에서 1934년에 재간행하여 문단으로부터 재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창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면서 명성도 높아지던 중, 1936년에 첫 아들 후미야가 사망하자 충격으로 환청과 신경쇠약 등의 현상을 겪으며 요양소에 입소까지 하게 된다. 그러다 1937년 10월 22일에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만 30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나카하라의 부탁을 받은 고바야시 히데오는 그가 사망하고 1년 후인 1938년에 그의 마지막 시집인 <지난날의 노래(在りし日の歌)>를 간행한다. 차남 요시마사를 남겼으나 아버지가 죽은 다음해에 사망하여, 그의 집안은 넷째동생 시로가 잇게 된다. 최근의 연구를 통해, 그가 죽던 그 해에 도쿄에서 죽은 조선의 시인 [[이상(작가)|이상]]과 교류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나카하라는 조선에 관심이 있어서 그에 대한 시들을 남겼고, 특히 죽기 얼마 전에 이상과 비슷한 시풍의 시들이 쓰여졌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